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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

2012. 10. 26. 16:39 | Posted by liberto

민식은 오늘도 퇴근길에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강변에 들렸다. 수색역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하지만 그는 언제나 광흥창역에서 내려 서강대교 주변을 한 시간가량 서성이곤 하는 것이었다. 한강변에 있는 어느 사람과도 그는 달랐다. 이어폰을 꽂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 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부모들, 서로의 얼굴을 보는 데 바빠 주변 경관을 감상할 시간도 없는 연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는 혼자였다.

회사에서 입던 감색 양복을 그대로 입고 왼손에는 서류가방을 든 채 가을 한강의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식은 수풀 한 구석에 들어가 앉았다. 멍하니 앉아 있길 이십 분여, 그는 서류가방에서 연습장과 뭉툭하게 깎은 4B연필을 꺼냈다. 연필을 쥐고 연습장을 노려보던 그는 이내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아무리 해도 한 획을 그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필 한 자루만 쥐면 못 그릴 게 없다고 자부했었는데, 한숨을 쉬어 보지만 한 달이 넘게 안 되던 게 오늘 갑자기 될 리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민식은 그림을 다시 그릴 생각을 했다. 언젠가부터 멀게만 느껴지던 그림을 다시 손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한 달 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달 전 겪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일에 치어 사느라 그림을 놓은 지 2년이 넘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날 했던 일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집안을 청소했다. 넓지 않은 집이지만 먼지를 털고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는 일은 시간을 꽤 요하는 일이었다.

물건을 정리하던 민식은 연습장 하나를 발견했다. 대학 때 과제랑 관계없는 잡다한 그림들을 그리던 연습장이었다. ‘대학 때 쓰던 물건들은 전부 상자에 넣어 놨을 텐데.’ 유독 연습장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별스럽게 느껴지긴 했으나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책상 위어 던져두었다. 청소를 끝내고 상자에 도로 넣어둘 셈이었다.

민식이 청소를 마무리하며 연습장을 정리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께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미 습관처럼 돼 버린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음날 늦잠을 잔 그가 아침도 못 먹고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서류가방에 쓸어 넣고 출근한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전날 아무리 일찍 자도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군대를 다녀와도 변하지 않는 습관 중 하나였다.

간신히 지각만 면해 출근한 민식은 부랴부랴 일할 준비를 했다. 컴퓨터를 켜고, 서류가방에서 필요한 서류들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이 때 연습장이 딸려 올라온 게 옆자리에 앉은 동료 선영의 관심을 끌었다.

어머, 귀여운 노트네. 새로 산 거에요? 민식 씨는 항상 칙칙한 것만 쓰는 줄 알았는데.”

그제야 민식은 연습장이 회사까지 딸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된 거에요. 대학 때 쓰던 건데 어쩌다 보니 가져왔네요.”

대학 때요? 민식씨 미대 나왔다고 했었죠? 그럼 안에 그림 그려진 거에요?”

, 조금.”

와아, 재밌겠다. 좀 봐도 돼요?”

안 돼요. 연습용으로 그리던 거라 제대로 그려진 게 없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게 민식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민식은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해야 되니까, 이따가요.”

라고 일단 넘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저 그녀가 잊어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선영은 민식처럼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올라오자마자 민식을 재촉하며 연습장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민식은 여전히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별 수 없이 연습장을 꺼냈다.

연습장의 그림은 모두 연필로만 그려져 있었다. 거칠게 몇 번 그어놓고 끝낸 그림도 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한 그림도 있었다. 첫 장부터 차분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던 선영은 어느새 맨 뒤의 그림까지 다 보았다. 민식은 왠지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와 같은 기분이 되어 불안하게 선영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져요. 민식씨 그림 되게 잘 그린다.”

선영의 감상평은 짧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민식은 대학을 헛 다닌 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진심으로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일 것이었다. 그날 저녁, 선영은 퇴근하는 민식을 불러세웠다.

멋진 그림을 보여줬으니 오늘 밤에 술 한 잔 살게요.”

회사 근처의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시며 그들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대학 시절 이야기로 말문을 터서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깊어가는 이야기와 함께 밤도 깊어 민식은 선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막차에 몸을 실었다.

우웅- 하는 휴대전화의 진동이 민식에게 문자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다음엔 내 그림 그려줘요. 초상화도 그릴 수 있죠?’

이 문자를 받고 민식은---

다음 정거장은 수색, 수색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 안내방송이 민식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식은 여러 차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한 번은 친구 영철의 전화번호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민식은 전화를 걸지 못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림을 그리며 먹고사는 친구에게 전화하는 게 어딘가 쑥스럽고 자존심 상해서일 것이다.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다음날, 민식이 출근하자마자 선영이 말을 걸었다.

민식씨, 그림 그려주기로 한 건 언제쯤 돼요? 매일 바쁘다고만 하고, 사실은 한가해 보이는데.”

도저히 못 그리겠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번 주말 어때요?”

민식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의 입을 원망했지만, 그에게 한 번 한 말을 주워 담는 재주는 없었다.

이번엔 웬일로 흔쾌히 대답하네요? 좋아요. 그럼 토요일날 봐요.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

비만 안 오면, 한강변이 좋겠어요. 그림은 햇빛을 받으면서 그려야 잘 그려지거든요.”

민식의 마음이야 어떻든, 입은 잘도 말을 이어갔다.

알았어요. 모델은 화가 말에 따라야죠. 그럼 주말 기대하고 있을게요.”

선영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민식은 억지로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있었지만 글씨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식은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억지로 뭔가 하는 척 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민식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기 전에 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민식이.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이게 몇 년 만이야?”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2년의 시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듯 쾌활했다.

그냥 생각나서. 잘 지냈지? 요새 회사일이 바쁘다 보니 연락하기 좀 힘들더라.”

영철은 몇 마디 더 안부를 주고받고는 용건을 꺼냈다.

지금 바쁘냐? 아니, 바빠도 웬만하면 좀 보자. 부탁한다.”

한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가야지. 어디서 볼까?”

지금 어딘데? 내가 그 쪽으로 갈게.”

그래? 그럼 홍대 앞으로 와라. 우리 자주 가던 술집 기억나지?”

당연하지. 홍대면 한 30분 걸릴 거다. 도착해서 또 연락할게.”

 

술잔을 가운데 두고 영철과 마주앉은 민식은 안주가 채 나오기도 전에 거푸 소주 석 잔을 들이켰다.

, 요새 그림을 못 그리겠어.”

민식은 대뜸 본론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2년간 그림을 놓고 지냈는데, 다시 그림 그리려니까 연필이 안 나가. 도와줘.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뻥도 정도껏 쳐야지. 내가 네 그림 한두 번 본 줄 알아? 딴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걸 믿으라고?”

내가 고작 뻥이나 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진지하게 좀 들어.”

좋아. 그럼 한 번 보자.”

영철은 자신의 가방에서 연습장과 연필을 꺼냈다.

아무 거나 한 번 그려봐.”

연습장 빈 쪽을 펼치며 영철이 말했다. 민식은 연필을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 거라고 하면 못 그리겠어? 그럼 저 장식 한 번 그려 봐.”

영철이 창문에 달린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을 가리켰다. 민식은 종이 한가운데 연필을 대고 어느 방향으로도 선을 긋지 못하고 장식과 종이만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 중증이네.”

영철은 혀를 쯧, 차며 민식에게서 연필과 종이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안 되겠다. 일단 네 얘기나 들어보자.”

민식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영 씨가 자기 그림을 그려 달래. 근데 내가 그림을 안 그린 지 좀 됐거든.”

영철은 대체 선영 씨가 누구냐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민식의 이야기를 들어나갔다.

왜 그림을 안 그렸냐면 말이야, 대학 졸업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못 구해서 그런 거거든.”

민식은 고작 소주 석 잔에 취한 건지, 상당히 느린 어조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는 중간중간 소주 한 잔씩을 마셔 가며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뒤로 갈수록 술기운이 더해져 발음도 엉망이고 점점 삼천포로 빠져가는 이야기를 영철은 끝까지 들어주었다.

내가 말이지이그림놓고 싶어 그랬던 건아냐나도

결국 민식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풀썩 엎어져 버렸다.

나도그림

웅얼거리는 민식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밥 다 됐어. 일어나.”

영철의 목소리에 민식은 부어 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낯선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눈부셨다.

여기

내 집이야. 너 어제 쓰러져서 업고 오느라 힘들었다.”

그랬냐. 미안하다.”

별로 미안할 건 없고, 일단 밥 먹자.”

영철의 식탁에는 갓 지은 따뜻한 쌀밥과 북엇국, 몇 가지 반찬이 놓여 있었다.

밤새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이거라도 먹으면 좀 나을 거다.”

. 고마워.”

먹으면서 들어. 네 얘기를 듣고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너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욕심이라니?”

하루를 연습 안 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사흘을 연습 안 하면 모든 사람이 안댔어. 음악 얘기긴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근데 넌 벌써 2년이나 그림을 안 그렸다면서. 그럼 당연히 예전만큼 그릴 수가 없지. 고흐도 그만큼 오래 그림을 놓고 지내면 실력이 퇴보할걸?”

그야, 그렇겠지.”

근데 넌 예전만큼, 아니 예전보다 더 나은 실력이 돼 있기를 바라고 있잖아. 그런데 실제로 그림을 그려보면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이 드러날 것 같아서 무섭지? 그래서 한 획도 제대로 못 긋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는 앞으로도 영영 그림은 못 그려. 당장 오늘부터 처음 연필을 잡아본 유치원생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려. 어떤 천재도 연습 없이 잘 하는 사람은 없어. 너도, 대학 다닐 땐 하루도 그림 안 그리고 넘어간 날이 없었잖아? 네가 MT 가서도 그림 그려 대서 애들이 얼마나 신기해했었는지 아직도 기억나.”

알았어. 잘 먹었다.”

민식은 밥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잘 가고, 다음에 만나면 아무거나 하나 그려주라.”

그래. 충고 고맙다. 또 연락할게.”

민식은 영철의 집에서 나와 회사가 아닌 한강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걸어가며 민식은 휴대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부장님. 민식입니다. , 죄송한데 오늘 좀 급하게 하루만 휴가 받을 수 있을까요? 회사일이 우습냐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도 하루만 좀. 죄송합니다. , ,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주에 출근해서 꼭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민식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근처 문구점에서 사온 연습장을 꺼내들었다. 첫 획을 긋는 일은 여전히 망설여졌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길가를 푸르게 뒤덮고 있는 풀들을 바라보며 그는 차분히 강변을 걸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민식은 이름 모를 하얗고 자그마한 풀꽃을 앞에 두고 편히 앉았다. 무릎 위에 연습장을 두고 연필을 꺼내든 그는 단번에 선 하나를 내리그었다. 꽃을 받치고 있는 줄기를 표현하려 그은 선이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줄기의 미묘한 휘어짐을 표현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는 지우개를 꺼내는 대신 연필을 계속 놀렸다. 줄기 옆의 도톰한 잎을 그리고, 작은 꽃을 꽃잎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렸다.

일단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자 민식의 그림에 탄력이 붙었다. 좀 더 큰 꽃, 나무, 멀리 보이는 건물들, 다리 등 그리는 대상도 커졌다. 그가 보기에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그림들이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연습장을 채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 나왔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민식은 석양을 보고서야 점심도 안 먹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르륵, 뒤늦게 뱃속에서 밥을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연필을 들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마지막 장을 남겨놓고 일어서기가 아쉬워 연필을 들었는데, 무엇을 그릴지를 찾는 것이었다.

민식의 연필이 연습장 위를 달렸다. 정성스럽게, 그러나 느리지 않게 그는 종이를 채워나갔다. 짧은 선이 모여 있던 것이 어느새 구름이 되었다. 구름만으로 종이가 가득 차나 싶더니 한쪽에 둥근 선이 모였다. 어느새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한강의 서쪽 하늘을 물들인 석양이었다.

그림을 마무리한 민식은 고개를 들다 꼬마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아저씨 그림 되게 잘 그린다.”

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면 실례에요.”

옆에서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타이르고 민식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방해되는 줄은 알지만 아이가 너무 집중해서 보고 있어서.”

아녜요. 막 일어나려던 참인걸요.”

민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해야지. 그리고 이건 선물.”

민식은 방금 자신이 채운 연습장을 아이에게 주었다.

, 나도 꼬마 아니다 뭐.”

툴툴거리면서도 아이는 연습장을 꼭 끌어안았다.

너도 열심히 연습하면 오빠보다 그림 잘 그릴 수 있을 거야. 그럼 잘 가렴.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 총각도 살펴 가요.”

 

토요일, 민식은 그림 도구를 챙겨들고 한강으로 나섰다. 다행히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선영과는 미리 연락을 해서 약속장소를 잡아놓은 터였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민식은 그림 도구를 펼쳐두고 배경으로 쓰기 좋은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저 멀리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에 가벼운 겉옷을 걸친 선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식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에요, 선영 씨.”

선영이 반색하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회사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어제는 회사도 빠지고,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비밀이에요. 좀 부끄러운 일이라. 그나저나, 바로 시작할까요?”

어머, 급하긴. 놀러 나왔으면 좀 여유를 가져 봐요.”

얼른 한 장 그려야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요.”

그러시다면야. 그럼 여기쯤 앉으면 될까요?”

봐둔 데가 있어요. 조금만 더 이쪽으로 와요. , 거기에요. 그쪽으로 앉으시면 돼요.”

기대할게요. 아참, 도시락 싸왔는데 그림이 영 별로면 나 혼자만 먹을 거예요?”

점심 얻어먹으려면 열심히 그려야겠네요. 그럼 잠시만 앉아 계세요.”

도화지에 연필을 가져가는 민식의 손에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식은 힘차게, 그리고 차분하게 한 획 한 획 그림을 그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