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
liberto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단편 모음'에 해당되는 글 4

  1. 2012.10.26 연습장
  2. 2008.09.21 구름과 무지개
  3. 2008.08.01 어떤 작별
  4. 2007.04.17 행복 - 1 2

연습장

2012. 10. 26. 16:39 | Posted by liberto

민식은 오늘도 퇴근길에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강변에 들렸다. 수색역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하지만 그는 언제나 광흥창역에서 내려 서강대교 주변을 한 시간가량 서성이곤 하는 것이었다. 한강변에 있는 어느 사람과도 그는 달랐다. 이어폰을 꽂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 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부모들, 서로의 얼굴을 보는 데 바빠 주변 경관을 감상할 시간도 없는 연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는 혼자였다.

회사에서 입던 감색 양복을 그대로 입고 왼손에는 서류가방을 든 채 가을 한강의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식은 수풀 한 구석에 들어가 앉았다. 멍하니 앉아 있길 이십 분여, 그는 서류가방에서 연습장과 뭉툭하게 깎은 4B연필을 꺼냈다. 연필을 쥐고 연습장을 노려보던 그는 이내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아무리 해도 한 획을 그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필 한 자루만 쥐면 못 그릴 게 없다고 자부했었는데, 한숨을 쉬어 보지만 한 달이 넘게 안 되던 게 오늘 갑자기 될 리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민식은 그림을 다시 그릴 생각을 했다. 언젠가부터 멀게만 느껴지던 그림을 다시 손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한 달 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달 전 겪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일에 치어 사느라 그림을 놓은 지 2년이 넘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날 했던 일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집안을 청소했다. 넓지 않은 집이지만 먼지를 털고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는 일은 시간을 꽤 요하는 일이었다.

물건을 정리하던 민식은 연습장 하나를 발견했다. 대학 때 과제랑 관계없는 잡다한 그림들을 그리던 연습장이었다. ‘대학 때 쓰던 물건들은 전부 상자에 넣어 놨을 텐데.’ 유독 연습장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별스럽게 느껴지긴 했으나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책상 위어 던져두었다. 청소를 끝내고 상자에 도로 넣어둘 셈이었다.

민식이 청소를 마무리하며 연습장을 정리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께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미 습관처럼 돼 버린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음날 늦잠을 잔 그가 아침도 못 먹고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서류가방에 쓸어 넣고 출근한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전날 아무리 일찍 자도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군대를 다녀와도 변하지 않는 습관 중 하나였다.

간신히 지각만 면해 출근한 민식은 부랴부랴 일할 준비를 했다. 컴퓨터를 켜고, 서류가방에서 필요한 서류들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이 때 연습장이 딸려 올라온 게 옆자리에 앉은 동료 선영의 관심을 끌었다.

어머, 귀여운 노트네. 새로 산 거에요? 민식 씨는 항상 칙칙한 것만 쓰는 줄 알았는데.”

그제야 민식은 연습장이 회사까지 딸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된 거에요. 대학 때 쓰던 건데 어쩌다 보니 가져왔네요.”

대학 때요? 민식씨 미대 나왔다고 했었죠? 그럼 안에 그림 그려진 거에요?”

, 조금.”

와아, 재밌겠다. 좀 봐도 돼요?”

안 돼요. 연습용으로 그리던 거라 제대로 그려진 게 없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게 민식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민식은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해야 되니까, 이따가요.”

라고 일단 넘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저 그녀가 잊어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선영은 민식처럼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올라오자마자 민식을 재촉하며 연습장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민식은 여전히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별 수 없이 연습장을 꺼냈다.

연습장의 그림은 모두 연필로만 그려져 있었다. 거칠게 몇 번 그어놓고 끝낸 그림도 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한 그림도 있었다. 첫 장부터 차분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던 선영은 어느새 맨 뒤의 그림까지 다 보았다. 민식은 왠지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와 같은 기분이 되어 불안하게 선영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져요. 민식씨 그림 되게 잘 그린다.”

선영의 감상평은 짧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민식은 대학을 헛 다닌 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진심으로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일 것이었다. 그날 저녁, 선영은 퇴근하는 민식을 불러세웠다.

멋진 그림을 보여줬으니 오늘 밤에 술 한 잔 살게요.”

회사 근처의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시며 그들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대학 시절 이야기로 말문을 터서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깊어가는 이야기와 함께 밤도 깊어 민식은 선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막차에 몸을 실었다.

우웅- 하는 휴대전화의 진동이 민식에게 문자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다음엔 내 그림 그려줘요. 초상화도 그릴 수 있죠?’

이 문자를 받고 민식은---

다음 정거장은 수색, 수색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 안내방송이 민식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식은 여러 차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한 번은 친구 영철의 전화번호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민식은 전화를 걸지 못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림을 그리며 먹고사는 친구에게 전화하는 게 어딘가 쑥스럽고 자존심 상해서일 것이다.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다음날, 민식이 출근하자마자 선영이 말을 걸었다.

민식씨, 그림 그려주기로 한 건 언제쯤 돼요? 매일 바쁘다고만 하고, 사실은 한가해 보이는데.”

도저히 못 그리겠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번 주말 어때요?”

민식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의 입을 원망했지만, 그에게 한 번 한 말을 주워 담는 재주는 없었다.

이번엔 웬일로 흔쾌히 대답하네요? 좋아요. 그럼 토요일날 봐요.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

비만 안 오면, 한강변이 좋겠어요. 그림은 햇빛을 받으면서 그려야 잘 그려지거든요.”

민식의 마음이야 어떻든, 입은 잘도 말을 이어갔다.

알았어요. 모델은 화가 말에 따라야죠. 그럼 주말 기대하고 있을게요.”

선영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민식은 억지로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있었지만 글씨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식은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억지로 뭔가 하는 척 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민식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기 전에 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민식이.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이게 몇 년 만이야?”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2년의 시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듯 쾌활했다.

그냥 생각나서. 잘 지냈지? 요새 회사일이 바쁘다 보니 연락하기 좀 힘들더라.”

영철은 몇 마디 더 안부를 주고받고는 용건을 꺼냈다.

지금 바쁘냐? 아니, 바빠도 웬만하면 좀 보자. 부탁한다.”

한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가야지. 어디서 볼까?”

지금 어딘데? 내가 그 쪽으로 갈게.”

그래? 그럼 홍대 앞으로 와라. 우리 자주 가던 술집 기억나지?”

당연하지. 홍대면 한 30분 걸릴 거다. 도착해서 또 연락할게.”

 

술잔을 가운데 두고 영철과 마주앉은 민식은 안주가 채 나오기도 전에 거푸 소주 석 잔을 들이켰다.

, 요새 그림을 못 그리겠어.”

민식은 대뜸 본론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2년간 그림을 놓고 지냈는데, 다시 그림 그리려니까 연필이 안 나가. 도와줘.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뻥도 정도껏 쳐야지. 내가 네 그림 한두 번 본 줄 알아? 딴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걸 믿으라고?”

내가 고작 뻥이나 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진지하게 좀 들어.”

좋아. 그럼 한 번 보자.”

영철은 자신의 가방에서 연습장과 연필을 꺼냈다.

아무 거나 한 번 그려봐.”

연습장 빈 쪽을 펼치며 영철이 말했다. 민식은 연필을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 거라고 하면 못 그리겠어? 그럼 저 장식 한 번 그려 봐.”

영철이 창문에 달린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을 가리켰다. 민식은 종이 한가운데 연필을 대고 어느 방향으로도 선을 긋지 못하고 장식과 종이만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 중증이네.”

영철은 혀를 쯧, 차며 민식에게서 연필과 종이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안 되겠다. 일단 네 얘기나 들어보자.”

민식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영 씨가 자기 그림을 그려 달래. 근데 내가 그림을 안 그린 지 좀 됐거든.”

영철은 대체 선영 씨가 누구냐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민식의 이야기를 들어나갔다.

왜 그림을 안 그렸냐면 말이야, 대학 졸업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못 구해서 그런 거거든.”

민식은 고작 소주 석 잔에 취한 건지, 상당히 느린 어조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는 중간중간 소주 한 잔씩을 마셔 가며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뒤로 갈수록 술기운이 더해져 발음도 엉망이고 점점 삼천포로 빠져가는 이야기를 영철은 끝까지 들어주었다.

내가 말이지이그림놓고 싶어 그랬던 건아냐나도

결국 민식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풀썩 엎어져 버렸다.

나도그림

웅얼거리는 민식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밥 다 됐어. 일어나.”

영철의 목소리에 민식은 부어 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낯선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눈부셨다.

여기

내 집이야. 너 어제 쓰러져서 업고 오느라 힘들었다.”

그랬냐. 미안하다.”

별로 미안할 건 없고, 일단 밥 먹자.”

영철의 식탁에는 갓 지은 따뜻한 쌀밥과 북엇국, 몇 가지 반찬이 놓여 있었다.

밤새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이거라도 먹으면 좀 나을 거다.”

. 고마워.”

먹으면서 들어. 네 얘기를 듣고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너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욕심이라니?”

하루를 연습 안 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사흘을 연습 안 하면 모든 사람이 안댔어. 음악 얘기긴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근데 넌 벌써 2년이나 그림을 안 그렸다면서. 그럼 당연히 예전만큼 그릴 수가 없지. 고흐도 그만큼 오래 그림을 놓고 지내면 실력이 퇴보할걸?”

그야, 그렇겠지.”

근데 넌 예전만큼, 아니 예전보다 더 나은 실력이 돼 있기를 바라고 있잖아. 그런데 실제로 그림을 그려보면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이 드러날 것 같아서 무섭지? 그래서 한 획도 제대로 못 긋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는 앞으로도 영영 그림은 못 그려. 당장 오늘부터 처음 연필을 잡아본 유치원생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려. 어떤 천재도 연습 없이 잘 하는 사람은 없어. 너도, 대학 다닐 땐 하루도 그림 안 그리고 넘어간 날이 없었잖아? 네가 MT 가서도 그림 그려 대서 애들이 얼마나 신기해했었는지 아직도 기억나.”

알았어. 잘 먹었다.”

민식은 밥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잘 가고, 다음에 만나면 아무거나 하나 그려주라.”

그래. 충고 고맙다. 또 연락할게.”

민식은 영철의 집에서 나와 회사가 아닌 한강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걸어가며 민식은 휴대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부장님. 민식입니다. , 죄송한데 오늘 좀 급하게 하루만 휴가 받을 수 있을까요? 회사일이 우습냐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도 하루만 좀. 죄송합니다. , ,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주에 출근해서 꼭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민식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근처 문구점에서 사온 연습장을 꺼내들었다. 첫 획을 긋는 일은 여전히 망설여졌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길가를 푸르게 뒤덮고 있는 풀들을 바라보며 그는 차분히 강변을 걸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민식은 이름 모를 하얗고 자그마한 풀꽃을 앞에 두고 편히 앉았다. 무릎 위에 연습장을 두고 연필을 꺼내든 그는 단번에 선 하나를 내리그었다. 꽃을 받치고 있는 줄기를 표현하려 그은 선이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줄기의 미묘한 휘어짐을 표현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는 지우개를 꺼내는 대신 연필을 계속 놀렸다. 줄기 옆의 도톰한 잎을 그리고, 작은 꽃을 꽃잎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렸다.

일단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자 민식의 그림에 탄력이 붙었다. 좀 더 큰 꽃, 나무, 멀리 보이는 건물들, 다리 등 그리는 대상도 커졌다. 그가 보기에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그림들이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연습장을 채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 나왔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민식은 석양을 보고서야 점심도 안 먹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르륵, 뒤늦게 뱃속에서 밥을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연필을 들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마지막 장을 남겨놓고 일어서기가 아쉬워 연필을 들었는데, 무엇을 그릴지를 찾는 것이었다.

민식의 연필이 연습장 위를 달렸다. 정성스럽게, 그러나 느리지 않게 그는 종이를 채워나갔다. 짧은 선이 모여 있던 것이 어느새 구름이 되었다. 구름만으로 종이가 가득 차나 싶더니 한쪽에 둥근 선이 모였다. 어느새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한강의 서쪽 하늘을 물들인 석양이었다.

그림을 마무리한 민식은 고개를 들다 꼬마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아저씨 그림 되게 잘 그린다.”

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면 실례에요.”

옆에서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타이르고 민식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방해되는 줄은 알지만 아이가 너무 집중해서 보고 있어서.”

아녜요. 막 일어나려던 참인걸요.”

민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해야지. 그리고 이건 선물.”

민식은 방금 자신이 채운 연습장을 아이에게 주었다.

, 나도 꼬마 아니다 뭐.”

툴툴거리면서도 아이는 연습장을 꼭 끌어안았다.

너도 열심히 연습하면 오빠보다 그림 잘 그릴 수 있을 거야. 그럼 잘 가렴.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 총각도 살펴 가요.”

 

토요일, 민식은 그림 도구를 챙겨들고 한강으로 나섰다. 다행히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선영과는 미리 연락을 해서 약속장소를 잡아놓은 터였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민식은 그림 도구를 펼쳐두고 배경으로 쓰기 좋은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저 멀리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에 가벼운 겉옷을 걸친 선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식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에요, 선영 씨.”

선영이 반색하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회사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어제는 회사도 빠지고,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비밀이에요. 좀 부끄러운 일이라. 그나저나, 바로 시작할까요?”

어머, 급하긴. 놀러 나왔으면 좀 여유를 가져 봐요.”

얼른 한 장 그려야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요.”

그러시다면야. 그럼 여기쯤 앉으면 될까요?”

봐둔 데가 있어요. 조금만 더 이쪽으로 와요. , 거기에요. 그쪽으로 앉으시면 돼요.”

기대할게요. 아참, 도시락 싸왔는데 그림이 영 별로면 나 혼자만 먹을 거예요?”

점심 얻어먹으려면 열심히 그려야겠네요. 그럼 잠시만 앉아 계세요.”

도화지에 연필을 가져가는 민식의 손에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식은 힘차게, 그리고 차분하게 한 획 한 획 그림을 그려나갔다.

구름과 무지개

2008. 9. 21. 19:23 | Posted by liberto

구름들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동산이 있었어요.
뭉게구름, 양떼구름, 버섯구름, 실구름, 먹구름...
많은 구름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어요.

구름동산 한 끝에는 무지개를 만드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종이를 기~일게 잘라서, 줄을 긋고, 일곱빛깔 물감으로 칠하면...
짠!
무지개가 완성됐어요.

완성된 무지개를 창문에 대고 부채로 부쳐주면
무지개가 하늘로 하늘로 훨훨 날아가서 하늘을 예쁘게 장식해요.

구름들은 무지개를 보면서 박수치고 좋아했어요.

어느 날, 먹구름이 무지개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나도 무지개처럼 예뻐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먹구름이 예뻐질 수 있을까요?

먹구름은 다른 구름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봤어요.

"어떻게 하면 예뻐질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먹구름은 슬퍼졌어요.
아무도 먹구름이 어떻게 하면 예뻐질 수 있는지 모르는 거에요.

먹구름은 고민 끝에 무지개를 먹어보기로 했어요.

와그작와그작. 냠냠. 쩝쩝쩝.

하지만 아무리 무지개를 먹어도 먹구름은 예뻐지지 않았어요.
다른 구름들은 먹구름을 싫어하기 시작했어요.

"먹구름이 무지개를 먹는대."
"자기가 밉게 생겨서 무지개를 싫어하나 보지?"
"예쁜 무지개를 없애다니..."
"먹구름을 쫓아내자!"

결국 먹구름은 구름동산에서 쫓겨났어요.

여기저기 방황하던 먹구름은 무지개가 떠오르는 곳을 발견했어요.
먹구름은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어요.

무지개를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자 먹구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어요.

"얘야, 무엇이 그렇게 슬프니?"
"할아버지..."

먹구름은 대답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어요.

"허어...그렇게 울지만 말고 말을 해 보려무나."

얼마나 울었을까, 먹구름은 진정하고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저도 예뻐지고 싶어요. 그래서 무지개를 먹었는데..."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작업실로 먹구름을 데려갔어요.

"여기 앉아 보려무나.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눈에 물감이 들어갈지도 모르니 눈을 감고 있으렴."

할아버지는 먹구름에게 색을 칠해주기 시작했어요.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

색칠이 끝나자 먹구름은 온데간데 없고 무지개색 예쁜 구름이 앉아있네요!

"자, 됐다. 이제 눈을 떠보렴."

무지개구름은 눈을 뜨고 자기 모습을 보았어요.
색색으로 칠해진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할아버지, 고마워요."

그리고 무지개구름은 구름동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지개를 여기저기로 나르며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일을 했어요.

먹구름이 지나가면 비가 오고, 나중에 무지개가 뜨는 이유는 먹구름이 무지개를
가져오기 때문이래요.

어떤 작별

2008. 8. 1. 20:49 | Posted by liberto

Prologue
그녀가 떠난 지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난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생
각하며 그녀를 만났던 장소로 향한다...

1.
"할머니, 여기 콩나물국밥 하나 말아주세요."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허기를 달래려 단골 국밥집에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주머니가 나를 반겼다.

"콩나물국밥? 알았어. 그보다 총각,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네."

아주머니의 말에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7시 40분. 평소 7시 반 이전에 식사를
마치는 나로서는 확실히 늦은 편이다. 아침에 악몽을 꿔서 그런가. 평소보다
몸이 찌뿌드하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네, 오늘 아침은 좀 피곤해서요."
"그래. 총각, 우산은 안 챙겼어? 저녁 때쯤부터 비 온다던데."

비? 9시 뉴스는 스포츠뉴스 나올 무렵에 꺼버리니 그런 건 전혀 몰랐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이따가 우산 챙겨가야겠네요."
"꼭 챙겨 가. 자, 식사 나왔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이 집 콩나물국밥은 맛있기도 하지만 빨리 나오는 게 최고 장점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국밥을 후후 불어가며 들이마셨다. 평소보다 식사가 늦어서 그런지 왠지 마음이
조금했다. 급하게 먹다가 입천장을 델 뻔할 정도로.

"잘 먹었습니다. 여기요."

국밥 그릇과 돈을 아주머니께 건네주고 돌아서다 보니 달력이 눈에 띄었다.

"어? 달력 바꾸셨네요. 무슨 일 있으셨나 봐요."
"무슨 일은... 그냥 누가 선물로 주길래 바꿔봤지."
"그랬군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많이 파세요."

인사하고 나오면서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6월 27일. 벌써 그 날인가...

2.
출근길은 평소보다 더 갑갑했다. 평소엔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지하철을
타는데 오늘은 좀 늦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도 자동차를 사든지
해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지하철역을 나왔을 땐 이미 온 몸이 땀에 푹 절어 있
었다.

"어이, 김 대리. 오늘은 좀 늦었네."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대한이녀석이 나를 반겨줬다. 저 녀석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같이 다니고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인연
으로 엮여있는 녀석이다. 직급도 같다. 저 녀석은 강 대리, 나는 김 대리. 그러
면서도 어째선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꼭 직급으로 사람을 불러대는 특이한 녀
석이다.

"말도 마라. 이리저리 밀리다 보니 온 몸이 땀에 절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여름에 어쩌려고."
"글쎄, 나도 자동차를 사든지 해야지. 애인도 없고, 기름값 정도는 댈 수 있겠지."
"애인? 그러고보니 오늘이 그 날이네. 오늘도 갈거냐?"

저 녀석, 역시 쓸데없는 데서 예리하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갈래? 오늘은 회식 없지?"

일부러 말을 돌렸다. 이젠 나도 자유로워져야지.

"거긴 안 가게? 나야 좋지. 그럼 이따 업무 끝나고 보자고."

저 녀석은 이름만큼이나 덩치도 크고, 덩치만큼 술도 말술이다. 오랜만에 거하게
취해 볼까.

----

18시, 혹은 오후 6시. 업무가 끝나고 퇴근할 시간이다. 오늘의 업무 자료를 정리
하며 대한이를 찾았다.

"어이, 김 대리.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았나?"
"보다시피. 언젠 죽냐 그럼."

실없는 농담을 안부삼아 건네며 자료 정리를 마쳤다.

"어디 갈까? 비도 오는데 명월이네 가서 파전에 동동주 어때?"

비? 아아, 아주머니가 저녁에 비 온다고 했지. 제법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
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아까 우산 챙기는 거 잊어버렸는데.

"파전에 동동주? 좋지. 오늘은 내가 살게. 죽기 직전까지 마셔보자."

회사 문앞에서 파는 삼천 원짜리 우산 하나를 사들고 명월이네로 향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동료들과 자주 가는 곳이다. 싸고, 술맛도 좋고, 지하철 역에서
도 가깝고. 요새 사람들은 동동주보단 소주나 맥주를 더 좋아해서 그러는지 항상
자리가 많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좋아하기도 했지만.

"휴우, 비 한 번 거하게도 쏟아진다. 얼른 들어가자."

어느새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아주머니께 인사했다. 가게 안을 휘휘 둘러보며 빈 자리를
찾는데, 어째 빈 자리가 눈에 띄질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사람이 많지? 저기 안쪽에 빈 자리 하나 남았는데, 거기로 갈래?"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구석진 자리에 빈 곳이 하나 보였다.
그나마 다른 데로 옮겨야 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런 날씨에는 밖에 나가
기 부담스러운데.

"일단 동동주 한 사발에 파전 한 장 시키자. 다른 거 필요한 거 있어?"

내 물음에 대한이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였다.

"동동주 두 사발에 파전 세 장."
"그건 좀 많지 않아? 여기 파전 생각보다 큰 거 알잖아."
"괜찮아. 어차피 저녁도 안 먹었고, 한 장씩 시키면 귀찮잖아."
"그래도 파전은 따뜻할 때 먹어야지. 동동주 두 사발에 파전 하나 시키고, 파전은
이따가 더 시키자."
"귀찮은 걸 좋아하는 녀석같으니. 마음대로 해."

아주머니를 불러서 주문을 했다. 잠시 술을 기다리는 사이 대한이가 말을 걸어왔
다.

"웬일이냐? 이런 날 술이나 먹고. 거기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이제 안 가기로 했다. 몇 년이나 얽매여 살 순 없어."
"포기한 거냐. 그래 잘 선택했다. 짜식, 옆에서 보기 얼마나 안쓰러웠는데."
"후...안쓰러웠다라..."

마침 술이 나왔고, 나와 대한이는 번거롭게 서로 잔을 채워줄 사이는 아니기에 알
아서 한 잔씩 따르고 잔을 부딪혔다.

"인생을 포기한 만수를 위해 건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단 건배를 하고 봤다. 저녁을 먹지 않
아 비어있는 배에 칼칼한 동동주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마음에 든다.

"내가 무슨 인생을 포기했다 그래?"
"수진이가 바로 네 인생이라며?"
"몇 년 전 얘길..."

수진이 이름을 들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언제까지 결혼 안 하고 버틸 수는 없잖냐. 수진이는 언제 연락된다는 보장도 없
고...인연이 아니었나보지."
"잘 생각했네. 언제까지 한 사람한테만 매달려 있는 거, 보기 안 좋아."
"쳇, 네가 뭘 안다고."
"너보단 많이 알지."
"어딜, 내가 너보다도 모른다고? 그럼 난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사람이냐?"
"..."
"....."

재미없었나... 젠장, 하긴 언제 내가 개그치는 데 소질이 있던 적 있나.

"재미없는지는 아나 보구나. 넌 그냥 개그치지 말랬지?"
"좀 웃어주면 덧나냐. 젠장할 놈."
"난 정직한 사람이라 도저히 못 웃어주겠다."
"역시 사람 속 긁는 데는 신들렸어. 망할 놈."

마침 파전이 나와서 말하는 건 관두고 괜한 파전이나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아직
조금 심란하다. 그녀는 오늘도 안 왔겠지.

"자식, 수진이 생각하는구나. 하긴, 네놈이 안 그럴 리가 없지."
"아니다 임마."
"아니긴, 얼굴에 써 있어 자식아."
"개뿔이나 써 있겠다. 잔이나 들어. 헛소리하는 놈은 술로 입을 막아버려야지."

잔을 부딪히면서 생각했다. 내가 정말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나? 아니지,
저 놈이 신기하게 너무 잘 아는 것 뿐이겠지.

"크, 술맛 좋다. 역시 비 올 땐 파전에 동동주가 최고지."
"아무렴. 여긴 특히 맛있지."
"그렇지, 넌 딴 데는 맹해도 맛난 술은 잘 찾는단 말야. 신기해."
"내가 뭐가 맹해?"
"글쎄, 수진이 놓친 거? 뭐, 딴 것도 많이 있지만 이거면 충분하지."
"젠장할 놈. 역시 넌 보고 또 봐도 젠장할 놈이다."
"알면서 나랑 어울리는 너도 젠장할 놈이다."
"쳇..."

저 녀석이랑은 말싸움에서 도통 이길 수가 없다.

"그나저나 안 가봐도 돼? 오늘도 얼마 안 남았어."
"가보긴 뭘 가봐? 너 어디 갈 데 있어? 그럼 일어나든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 은근슬쩍 시계를 본다. 별 특징도 없는 시계가 1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 지금은 11시 40분이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약속시간좀 지
키라고 5분 빠르게 맞춰놓은 시계를 아직까지 제 시간으로 안 맞춰놓고 쓰고 있
다. 건전지를 갈아도 꼭 5분씩 습관적으로 빠르게 맞춰놓은 시계. 이것도 이제
제 시간에 맞게 맞춰놔야 될까.

"자식, 빼기는. 너 임마 빨리 나가 봐. 안 나가면 후회한다?"
"후회는 무슨. 죽었다 깨나도 후회따윈 안 한다."
"후회한다에 다음 술값 건다."
"그럼 난 후회 안 한다에 다음 술값 건다."
"아싸, 다음에 또 네가 사겠구나."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냐?"
"글쎄, 나랑 너랑 수진이를 믿고?"
"믿을 게 따로 있지 너를 믿냐."
"훗, 그렇게 말하면 나중에 후회한다니까."
"잔 들어라."

3.
5년만에 처음으로 6월 27일을 친구와 보내서 그런지, 평소엔 잘 안 먹히던 술이
술술 넘어갔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야, 일어나라. 난 간다."

뭐야, 내가 언제 잠들었나.

"다음 역은 충정로, 충정로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This stop is
Chungjeongro..."

응? 충정로? 그럼 지금 내가 지하철 안에 있는 건가?

"정신 드냐? 빨랑 일어나 임마. 이거 막차야. 너 다음 역에서 제대로 못 내리면
택시비 엄청 깨질걸?"

머리 아프고 졸립다.

"야, 일어나라니까!"

간신히 눈을 떴다.

"일어났냐? 난 내린다. 잘 들어가라."
"어, 이제 좀 정신이 든다. 잘 들어가라."

아직도 살짝 정신이 몽롱하다. 으그그그...
기지개를 켜니 좀 낫다. 이제 내릴 준비 해야지.

"다음 역은 아현, 아현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Ahyun..."

일어나야 되는데...왠지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다음 역은 이대, 이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This stop is
Ewha womens univ..."

"다음 역은 신촌, 신촌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Sinchon..."

몸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졌다. 자연스럽게 교통카드를 찍고, 항상 지나가던 2번
출구로 나와서...적당히 가서 꺾으면...
결국 와 버렸다. 안 오려고 대한이놈 만나서 술까지 먹었는데. 정신 차리고 있
으면 안 되니까 정말 먹다 죽을 만큼 먹으려고 했는데, 부족했나.
수진이와 자주 와서 앉아있던 벤치에 가 앉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

역시 바보같은 짓이다, 이런 짓. 비는 그쳤지만 이미 벤치는 젖을 대로 젖어 있
고, 바지 뒤쪽도 같이 축축해져 있고,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고...

"..."

괜히 머쓱해서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 이런 시간에 누가 있을 리가 없지. 저기
전봇대랑 열렬히 연애하고 있는 사람들은 빼고.

"저기..."

음?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술좀 먹었기로 환청이
들리나. 쳇, 수진이 목소리 같았는데... 이제 환청도 수진이 목소리로 들리나.
후, 피곤하다. 이제 집에 어떻게 가나. 아현까지 가려면, 택시라도 타야 되나.
젠장, 역시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어...

...

...

...

짹짹, 짹짹.
참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적당히 하늘이 파란 게, 좀 있으면 해가 뜰
것 같다. 응? 잠깐, 그럼 나 밖에서 잔 건가. 젠장, 역시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
어. 젠장, 젠장, 젠장!
후, 여튼 이제 술도 적당히 깼고, 집에 들어가야지.

"..."

대체 뭘 기대한 거냐. 수진이가 이런 데 올 리가 없잖아. 짐은, 음, 없어진 거 없
구나. 다행이다. 요새 술 먹고 뻗은 사람 노리는 날치기가 많다던데.
부지런한 사람들, 또는 나처럼 이제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거리에 간간히 보인
다. 후...그러고 보니 아직 지하철이 다닐 시간은 아닌가. 버스도 아직이고... 젠
장, 되는 일이 없구만. 걸어갈까...

"어떤 놈이 이런 데까지 뭘 붙여놓고 가는 거야? 귀찮게스리..."

저 쪽에서 뭔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소하는 할아버지였다. 청소 할아버지가 전
봇대에 붙은 종이를 떼고 있었다. 뭔가 글씨가 써 있는 종이같았다.

"편지를 줄 거면 직접 주든가, 귀찮게 이게 뭐야."

편지? 왠지 호기심이 생겼다.

"저, 할아버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응? 무슨 일인가?"
"저, 그 종이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이거? 봐서 뭐 하게. 여기 있네. 보고 나서 바닥에 버리진 말게."
"아, 네. 감사합니다."

편지는 물에 젖어서 글씨가 군데군데 번져있었다. 읽기 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예
못 읽을 수준은 아니었다. 편지를 대충 훓어봤지만 누구한테 쓰는 건지, 누가 쓰는
건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보면 아는 건가.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으니 읽어달라는
건가?
그런데 글씨체가 어쩐지 낯익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은 내 생일은 아닌데, 내가 태어난 날이에요. 내
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칠 년 전 오늘,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내가
태어난 날이에요.
그 사람이랑 나는 예쁘게 사랑했어요. 자랑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
고 말하니까 그런 거겠죠?
그 사람이 언젠가 나한테 그랬어요. 만약에 자기가 먼 곳으로 떠나가는 일이 생겨
도 매년 오늘은 여기로 온다고. 여기서 날 기다려준다고 했어요.
바보같죠, 나. 혹시나 해서 나와봤는데 역시나 그 사람은 안 왔어요. 헤헷...아마
그 사람은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겠죠? 여기로 온다는 말같은 거 잊어버렸을
거에요.
그래도 개운하네요. 앞으로 그 사람을 만날 일은 없겠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읽어줘서 고마워요.'

비는 그쳤는데 편지 글씨가 더 번져간다.

버스 다닐 시간이 됐다. 나는 일어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Epilogue
언제였던가, 스치듯 말했지.
만일 우리가 헤어질지라도,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게 보고싶을 땐,
나는 해마다 처음 만난 그 날,
그 곳에 가 있겠다고.
허나 끝내 넌 오지 않았지, 여러 해가 지나도.

그 날이 다시 돌아왔지만,
어제는 난 가지 않은 거야.
혼자 돌아올 길인 걸 알기에...

밤새 널 지워보려.
기억 저 편으로 애써 너를 밀어두었다가,
새벽녘에 찾은 그 곳엔
네가 남기고 간 슬픈 글.
아마 영원히 이 글이
그대에게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추억이라도 만나기 위해
다녀간다고...

어쩌면 난 해마다 돌아올
쓸쓸한 이 단 하루를 위해
나머지 날을 사는 건지 몰라.

밤새 널 지워보려.
기억 저 편으로 애써 너를 밀어두었다가,
새벽녘에 찾은 그 곳엔
네가 남기고 간 슬픈 글.
아마 영원히 이 글이
그대에게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추억이라도 만나기 위해

비록 지금쯤 그댄 다 잊은 채로
다른 누굴 위해 살겠지만,
지난 추억이라도 만나기 위해
다녀간다고...
-정재욱, 어떤 작별

행복 - 1

2007. 4. 17. 02:25 | Posted by liberto


"선생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새하얀 병실 안,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정(情)을 옆에 두고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힘듭니다. 이 병은 저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아직까진
이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단지, 단 한 번 이 병에 걸렸
던 환자가 살아난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떤 방법이죠? 정이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저, 담배 한 갑만 주세요."
편의점에 들어간 진(眞)이 카운터에서 쭈뼜댔다.
"죄송하지만 손님,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아, 여기요."
"예, 확인했습니다. 어떤 담배를 드릴까요?"
"아무 거나 주세요. 저기, 저 거요."
"예, 이천 오백 원입니다."
"여기요."
"오천 원 받았습니다. 여기 거스름돈 이천 오백 원입니다."


"콜록, 콜록. 으..."
진은 불붙인 지 30초도 안 되는 담배를 비벼 껐다. 진의 눈길은 정이 입원해 있
는 병실을 향해 있었다.


"선생님. 정이, 저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글쎄, 아마 한 달 이상은 힘들 겁니다. 수술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진이 의사의 팔을 잡았다.
"선생님, 수술하면 정이 확실히 나을 수 있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장담할 순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단 한 번 수술이 있었고, 그 수
술은 성공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조만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젊은이, 환자를 저 상태로 오래 둬봤자 환자만 고생할 뿐입니다. 수술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환자를 편히 보내 주는 게 환자를 위한 길일 수 있어요."
진의 눈에 독기가 스쳐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이는. 꼭.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달칵, 열린 문 안쪽에는 정이가 누워 있었고 옆에는 승(承)이가 앉아 있었다.
"어, 진이 왔네! 정이는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어."
승이가 손을 들어 환영했다.
"그래? 아쉽네. 바빠서 잘 찾아오지도 못 하는데...그래도 네가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다."
"에이, 다행은 무슨. 정이는 맨날 너만 기다리는데, 나는 옆에 있어봤자 도움도
안 돼."
"그랬어? 정이도 너무하네. 멀리 있는 사람보단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한 법인데."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그런데, 의사가 뭐라고 했어?"
순간, 진의 눈가에 그늘이 스쳐지나갔다. 승이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별로 대단한 병은 아니래. 뭐래더라... 병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잊어버렸는데,
그냥 수술 하면 낫는 병이래. 근데, 급한 환자가 너무 많아서 일정 잡기가 어렵나
보더라. 정이 병은 느긋하게 수술해도 되니까 이해해달라고 하시던데."
"에? 그래도 먼저 입원한 사람이 우선 아냐? 의사도 참 너무하네."
"최대한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 있다는데 우리 생각만 할 순 없잖아.
조금만 기다리면 선생님도 수술 일정 잡아 주시겠지."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좀 인간이 독한 면도 있어야지."
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성격인걸 뭐..."
"에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냐. 하긴, 정이는 네 그런 모습에 반했지."
그 때, 진의 주머니에서 김종국의 한 남자가 흘러나왔다.
"네, 진입니다.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네. 곧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에게 승이 말을 걸었다.
"가 봐야 돼? 정이 일어나면 얘기라도 좀 하고 가지."
"교수님 호출이야. 알잖아, 우리 교수님 성질 급한 거. 지금 안 가면 잘릴지도 몰라."
"알았어. 잘 가. 이따 정이 일어나면 너 왔다갔다고 얘기해 줄게."
"그래, 부탁해. 다음에 또 올게."

-------------------------------------------------------------------------------

단편입니다. 대략 3편 정도로 완결될 것 같습니다.

이전 1 다음